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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18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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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병기(1818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김창집의 후손이며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의 양자이다. 184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철종 사후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자 광주부유수로 좌천되었으나, 이후 다시 요직에 등용되어 좌찬성에 이르렀다. 흥선대원군과 교류하며 재정적으로 도왔으며, 김동인과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에서는 흥선군의 주요 정적으로 묘사된다. 문집으로 《사영집》이 있으며, 중요민속문화재인 사영 김병기 일가 옷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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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1818년)
기본 정보
이름김병기(金炳冀)
봉원(鳳遠)
창강(滄江)
석파(石坡)
연농산관(煙農山館)
본관안동 김씨
생년월일1818년 10월 13일 (음력 8월 15일)
사망일1875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묘소 위치경기도 광주군 동면
가족
아버지김이재(金頤在)
어머니정부인(貞夫人) 남양 홍씨(南陽 洪氏)
부인정부인(貞夫人) 파평 윤씨(坡平 尹氏)
아들김응원(金應元)
김석준(金奭準)
김씨(金氏), 이유승(李裕承)에게 출가
김씨(金氏), 이재원(李載元)에게 출가
관력
주요 관직대사헌
이조판서
공조판서
병조판서
지경연사
좌참찬
우참찬
판의금부사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예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총융사
수어사
경기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봉작충문공(忠文公)
기타 정보
관련 인물흥선대원군

2. 생애

김병기는 김창집의 후손으로, 생부는 김영근이지만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金左根)에게 입양되었다. 순원왕후의 조카뻘이 된다.

안동 김씨 세도 정치 시기에 몰락한 왕족으로서 파락호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과 교류하며 재정적으로 도왔다. 이러한 관계 덕분에 안동 김씨 일족이 대부분 숙청되었을 때에도 살아남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집으로 《사영집》이 있다.

2. 1. 관직 생활

184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정3품 당하관 통훈대부로 승진, 1848년 사복시정이 되었다. 1849년 철종 즉위 후, 다시 승진하여 성균대사성이 된 뒤에 종2품으로 거듭 승진,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853년 총융사, 훈련대장,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 각조의 판서직을 두루 역임하고, 1862년 판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1863년 12월 종일품 의정부좌찬성으로 있을 때 철종이 급서하자 신정왕후와 후계문제를 놓고 갈등하였으며, 고종이 즉위하고 1864년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집권하자 광주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이하전 사사와 이세보의 유배 이후 김병기는 흥선군이 신정왕후와 오랫동안 만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흥선군에게 왕위 계승권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김병기는 흥선군을 멸시하면서도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끝까지 바보행세를 하며, 장남 이재면이 부족한데 관직이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철종의 임종 후 그는 조대비의 왕위 계승권자 지목을 반대했지만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낙점됐다.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외직을 전전하다가,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다시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다.

안동 김씨 세도가 한창일 때 몰락왕족으로 파락호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과도 교류하며 어려움에 처했던 흥선대원군을 재정적으로 도운 관계로, 뒷날 안동 김씨 일족이 대부분 숙청되었을 때에도 살아남아 관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2. 2.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김병기는 안동 김씨 세도가 한창일 때 몰락 왕족으로 파락호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과 교류하며 재정적으로 도왔다. 뒷날 안동 김씨 일족이 대부분 숙청되었을 때에도 살아남아 관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1] 그러나 평소 흥선군을 무시하여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1]

김병기는 이하전 사사와 이세보의 유배 이후 흥선군이 신정왕후와 오랫동안 만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흥선군에게 왕위 계승권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김병기는 흥선군을 멸시하면서도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끝까지 바보 행세를 하며, 장남 이재면이 부족한데 관직이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1]

윤효정에 따르면, 흥선군은 김병기를 찾아가 아들 이재면의 문과 합격을 청탁했는데, 김병기는 마음 속으로 몰지각함과 비열함을 비웃으며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다.[1] 흥선군은 김병기의 사촌인 남병철에게도 똑같이 아들의 등과 합격을 청탁하니, 남병철은 몹시 분개했다. 왕실의 금지옥엽인데, 이렇게 초라해진 형편으로 아들의 등과를 청탁하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1]

흥선대원군은 일부러 김좌근에게 양아버지라 하면서 그에게도 용돈을 얻어 썼고, 김병기는 그를 심하게 무시했다 한다. 그는 김병기의 잔치 집에 갔다가 음식을 먹고는 일부러 구역질을 하다가 토해내고 쓰러졌는데, 김병기는 음식을 삼켜보았다. 그러자 일어나서는 장난에 과민반응한다고 답했다. 김병기는 분노했고 한동안 을 마셨다 한다.

다른 안동 김씨 인물들은 흥선군을 구박하거나 쫓아냈지만 김좌근은 쫓아내지 않고 귀찮아하거나 약간의 돈을 주어 내보냈다. 생계가 궁했던 흥선군은 매란국죽 등을 그려서 양반 사대부가와 중인 가문, 역관 등에게 팔았는데, 중인과 역관들을 통해 석파란의 명성이 청나라일본에도 알려졌다. 김병기는 흥선군의 난초화를 구입하였다.

1863년 철종의 임종 후, 김병기는 조대비의 왕위 계승권자 지목을 반대했지만 흥선군의 둘째 아들 고종으로 낙점됐다. 고종이 즉위하게 되자 김좌근과 김병기는 흥선대원군이 집정(執政)하는 데 반대했다.[2] 그러나 조대비는 김좌근 등의 반발을 무릅쓰고 흥선군의 정치 참여를 공식화했다.[2] 1864년 흥선대원군의 집권 이후, 광주부유수로 좌천되는 등 외직을 전전하다가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다시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1873년 명성황후흥선대원군을 축출하려 하자 그대로 가담했다.

2. 3. 기타

김병기는 흥선대원군이 몰락한 왕족으로 파락호 생활을 할 때 교류하며 재정적으로 도왔던 인물이다. 이러한 관계 덕분에 안동 김씨 일족이 숙청될 때도 살아남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1] 그러나 평소 흥선대원군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소설 《대원군》에서는 흥선대원군의 주요 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윤효정에 따르면, 흥선군은 김병기를 찾아가 아들 이재면의 문과 합격을 청탁했지만, 김병기는 속으로 비웃으며 대꾸하지 않았다고 한다.[1] 흥선군은 김병기의 사촌인 남병철에게도 같은 청탁을 했으나, 남병철은 몹시 분개했다고 한다.[1] 그러나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에는 흥선군을 멸시하던 인물로 남병철이 언급된다.

흥선대원군은 김좌근에게 양아버지라 부르며 용돈을 얻어 썼는데, 김병기는 그를 심하게 무시했다. 김병기의 잔치에서 흥선대원군이 음식을 먹고 구역질을 하며 쓰러지자, 김병기가 음식을 삼켜보았고, 흥선대원군은 장난에 과민반응한다고 답했다. 이에 김병기는 분노하여 한동안 을 마셨다는 일화는 김동인운현궁의 봄, 유주현의 《대원군》에도 묘사되었다.

다른 안동 김씨 인물들이 흥선군을 구박하거나 쫓아낸 반면, 김좌근은 그를 쫓아내지 않고 약간의 돈을 주어 내보냈다. 흥선군은 생계를 위해 그린 난초 그림(석파란)은 청나라일본에도 명성이 알려졌는데, 김병기는 흥선군의 난초화를 구입하기도 했다. 심의면 등이 흥선대원군을 노골적으로 멸시했지만, 김병기는 예술작품에서 흥선대원군의 주적으로 묘사되었다. 김병기는 1873년 명성황후흥선대원군을 축출하려 할 때 가담했다. 문집으로는 《사영집》이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생조부김복순(金復淳)
생부김영근(金泳根)
양조부김조순
양부김좌근
양모윤치승(尹致升)의 딸
부인남구순(南九淳)의 딸
아들김용균(金用均)


4. 관련 문화재

사영 김병기 일가 옷은 중요민속문화재 제6호로,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2] 서적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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